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INTERVIEW노상호: 좋은 작가는 드물다

기본 정보
상품명 INTERVIEW노상호: 좋은 작가는 드물다
상품요약정보
Noh Sangho: Good Artists Are Rare
2023. 8. 26.

인터뷰어: 유현선

상품간략설명 2023. 8. 26.

노상호는 작가이자 아트 디렉터이고, 3D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2018), 송은 아트큐브(2017), 서울시립미술관 웨스트웨어하우스(2016)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Q. 책, 영화, 노래에서 접한 문장 중 좋아하는 것 하나를 인용한다면?
A. [1] “만약 실수를 하면 스텝이 엉키고 그게 바로 탱고죠.”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대사다. 영화의 주제를 아우르는 대사이기도 하지만 이 문장이 연출된 방식을 좋아한다. 시각장애인이 된 노년의 전직 군인은 생을 마감하고자 떠난 여행에서 (물론 자신의 여행을 도와주는 아르바이트생에겐 비밀로 한 채) 우연히 카페 옆자리에 앉게 된 여성에게 탱고를 권한다. 탱고를 춰 본 적 없다는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지어낸 것 같은 ‘작업멘트’로, 그는 지나가듯 “만약 실수를 하면 스텝이 엉키고 그게 바로 탱고죠”라고 말한다. 그리고 호텔 방에서 생을 마감하려는 때, 아르바이트생이 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말리게 된다. 그는 절규하듯 “나에겐 어둠뿐이다”라고 외치는데 아르바이트생은 이 대사를 그에게 다시 되돌려 준다.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장난스러운 말이 인생을 지지하고 살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인생이라는 대상을 잘 보여주는 연출된 장면이라는 점에서도 좋아하는 장면이다. 물론 “I’m in the dark!”라고 외칠 때 알파치노의 공허한 눈 연기도 덧붙여서 말이다. 강연 따위의 것을 준비할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데, 짧은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마치 내 인생을 굉장히 잘 계획하고 조직한 것처럼 나를 미화시키는 실수를 자주 저지르게 된다. 사실은 수많은 우연과 실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딱히 뭔가 계획했던 대로 되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스텝이 엉킬 때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를 때마다, 한 번씩 생각나는 영화다.

「THE GREAT CHAPBOOK-20230818」.



[2] “‘죽은 자를 일으킨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부적응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건 잘못이에요. 그 사람이 모든 것을 흔들었어요. 그 사람이 자기 말대로 한다면 우리는 모든 걸 버리고 그 사람을 따라가는 것밖에 할 게 없죠. 그런데 그 사람이 안 그러면 우리는 남아 있는 짧은 시간을 힘껏 즐기는 수밖에 없어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불을 지를 수도 있고 다른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어요. 나쁜 짓만큼 재미난 게 없거든요.’ 그의 목소리는 거의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문장이다. 평화로운 여행길에 갑작스레 닥친 강도에게 살려달라며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반복해서 설득하는 할머니에게 강도가 대답하는 장면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는 좋아할 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할머니도 애정을 주기에는 위선적이고 불편한 인물이다. 그녀가 강도를 설득하는 말은 종교적인 신념을 기반으로 한 교조적이고 기만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강도의 궤변은 역설적으로 통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코너의 소설에는 어느 쪽의 편도 들 수 없는 묘한 상황과, 아주 작은 말이나 행동으로 인생이 뒤흔들리는 순간이 가득하다. 그래서 오코너의 소설이 왜 좋은지 설명하기도 굉장히 어렵다. 앞에서 인용한 문장도 문맥 속에서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똑 떼어 놓고 보면 의미 없게 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런 작업이 어렵고 고급스러운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결국에는 그런 작업이 하고 싶다. 물론 좋은 사람은 드문 것처럼 좋은 작가도 드물기 때문에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THE GREAT CHAPBOOK-E-084」.

Q. 현재의 문화 지형에서 당신의 관심을 가장 자극하는 사람이나 흐름은?
A. 애니메이션 감독 알베르트 미엘고(Alberto Mielgo)의 활동을 계속 주시해서 보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러브, 데스, 로봇』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진 감독으로, 시즌 1에서 가장 유명했던 에피소드 「목격자」와 시즌 2의 에피소드 「사이렌」을 만들었다. 소니에서 제작한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초기 콘셉트를 작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가장 센세이셔널 한 모든 작업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다.

미엘고를 주목하는 이유는 최근 고민하던 흐름에 대해 아주 적절한 답을 보여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숏폼 콘텐츠와 유튜브의 유행에 더불어 시각 작업물은 점점 더 짧고 강렬해지고 있다. 소규모 스튜디오나 개인 작업자는 이렇게 거대한 스펙터클에 대항해서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미엘고는 ‘더 짧게, 하지만 더 강렬한 퀄리티’로 만든다는 해결책을 제안한다. 예를 들면, 한 달 동안 30분 길이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 대신, 한 달 동안 5분 길이의 콘텐츠를 중요한 장면만 모아 완성도 높은 퀄리티로 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절된 서사는 관객이 자발적으로 연결하거나 다른 2차 작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 상황을 작가에게 적용한다면 3D 툴을 이용해 현실에서는 비용이 많이 드는 장소에 작업을 가상으로, 하지만 진짜같이 설치해볼 수 있다. 또는 실제로는 매우 작은 그림을 높은 퀄리티로 재생산해 인스타그램에서 간단하게 스펙터클을 쟁취할 수도 있다.

「THE GREAT CHAPBOOK-20230819」.

Q. 최근 구입한 것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A. 스텔톤(Stelton)의 물병과 물잔을 구입했다. 최근에는 가격이 비싸더라도 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은 예쁘고 좋은 것을 사려고 한다. 좋은 디자인을 삶의 가까운 데서 접하면 기분이 소소하게 좋아지고, 그 기분이 쌓여 경험이 된다. 구입한 물병과 물잔이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가 디자인한 제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디자인한 책상을 식탁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스텔톤의 물병과 물잔. 이미지: ssense.com

Q. 온라인에서 수많은 이미지를 수집하고 있다. 최근 흥미로웠던 이미지는 무엇인가?
A. 이미지를 무작위로 수집해 그리고 있는데, 살펴보니 인형 탈을 쓴 사람, 캐릭터를 조악하게 모방한 인형이나 풍선 등의 이미지를 많이 수집했다. 준비하고 있는 내년 전시에도 사용할 말인데, ‘틈’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린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로, 또는 아날로그가 디지털화되면서 생기는 오류나 번역의 과정에서 생기는 낙차에 흥미가 있고, 인형 탈이 그 틈의 부속물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2D 애니메이션을 사람이 착용할 수 있는 인형 탈로 만들기 위해 발생하는 조악한 미감에서 묘한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인간의 형상이 아닌 것을 인간이 착용할 수 있게 만들면서 생기는 이상한 생명의 기운을 느끼기도 한다.

「THE GREAT CHAPBOOK 4 Holy」.

Q. 패션 브랜드의 숍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디스플레이 방식을 전시 설치에 적용했다. 패션에 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었는데, 패션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
A. 패션의 가장 큰 매력은 ‘작동하는’ 세계라는 점이다. 하이패션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경우 생각보다 다른 산업의 리더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개인이 끼치는 영향력이 크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미감에 다양한 사람이 공감하고 구매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발렌시아가를 예로 들면, 인공 눈이 내리는 거대한 원형 공간을 고생스럽게 거닐고 있는 모델을 따뜻한 실내에서 바라보는 디스토피아적 장면을 짧은 시간 내에 압도적인 규모로 구현하고, ‘정말 이렇게까지 만들어도 돼?’라고 생각할 만한 전위적인 작품으로 대중을 설득하고 구매하게 만든다는 점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미술보다 더 즉각적이고 공격적인 구조의 산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반대로는 큰 자본과 이어져 있다는 부분이 불편할 때도 있지만, 이따금 미술은 아무런 동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서 무한하고 자극적인 동력의 패션산업을 바라보고 있으면 신기하다.

『THE GREAT CHAPBOOK 2』 설치 전경, 2018.

아마도 애뉴얼날레 〈목하진행중〉 설치 전경, 2017.

유현선은 워크룸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카우프만과 파일드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RANDOM RE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