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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김선오: 나는 사치스럽게 잔다

기본 정보
상품명 INTERVIEW김선오: 나는 사치스럽게 잔다
상품요약정보
Kim Sono: I sleep indulgently
2024. 3. 2.

인터뷰어: 김형진

상품간략설명 2024. 3. 2.

김선오는 시인이다.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20년 『나이트 사커』로 활동을 시작했다. 『세트장』, 『미지를 위한 루바토』, 『시차 노트』 등을 썼다.



Q. 책, 영화, 노래에서 접한 문장 중 좋아하는 것 하나를 인용한다면?
A.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은 무한함과 우리가 맺는 관계이며, 우리가 무한함에 동조하는 방식이다.” 아직 출간되지 않은 책의 문장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산문집 『세상의 발견』에 수록되어 있는데 미리 읽고 추천사를 쓸 기회가 있었다. 출간되지 않은 책의 문장이 먼저 소개되는 비선형적인 방식이 재미있을 것 같아 가져와 보았다.



Q. 현재의 문화 지형에서 당신의 관심을 가장 자극하는 사람이나 흐름은?
A.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작년에는 내가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라는 껍데기에 둘러싸인 문학 혹은 영화의 시적인 측면을 좋아했던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나름의 놀라운 발견이었다. 시집 출간 이후 나의 시들이 영화적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시의 언어와 영상 언어 사이 어딘가에 나의 시가 위치해 있는 모양이다. 시의 언어는 읽는 이들의 머릿속에 이미지를 사영하고, 영상 언어는 스크린에 이미지를 사영한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영화가 이미지로서의 과거를 포획하여 노출한다면, 시는 말에 담긴 모든 관념으로서의 과거를 노출한다. 아피찻퐁은 한 인터뷰에서 시를 쓰듯이 영화를 만든다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이런 인상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영화는 아주 작은 것, 말하자면 중요하지 않은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제게는 이 작업이 흥미로워요. 삶이 아주 작은 거라는,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깊은 사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런 중요하지 않은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이요.”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공연 장르로 구분되는 〈열병의 방〉이다. 이러한 장르적 구획을 떠나 그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그가 하고 있는 것이라는 직감이 든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 스틸컷.

Q. 최근 구입한 것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A. 얼마 전 선물용으로 구입했던 플라네타리움을 어떤 사정에 의해 방에 두게 되었다. 디스크를 넣고 전원을 켜면 천장에 우주가 펼쳐지는 천체 투영기로 내 방에 별들을 영사한다. 틀어두고 침대에 누워 일종의 미물-되기를 수행한다. 별똥별이 떨어지도록 설정값을 변경할 수도 있다. 물론 가짜 별똥별이지만 생각해 보면 마침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순간에 우주를 떠돌던 암석이 지구의 대기권과 마찰하며 사라지는, 그러한 진짜 별똥별 현상이 내게 일어난 일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도 딱히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플라네타리움이 흩뿌리는 내 방의 별들 아래에서도 소원을 빌 수 있다.

천장에 우주를 영사하는 플라네타리움.

Q. 유튜브 클립에서 당신이 『나이트 사커』나 『시차 노트』의 표지 디자인에 대해 짧게 언급하는 걸 들은 기억이 난다. 보편적인 시집 디자인과 다르다거나 하얀 겨울과 어울린다거나 하는 이야기였다. 작가에게 표지란 어쩌면 남이 입혀주는 외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외투 같은 표지 시안이 온다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
A. 원고와 함께 표지 디자인에 대한 간단한 레퍼런스와 원하는 톤을 전달하는 편이다. 따라서 제정신으로 입을 수 없는 외투 정도의 표지 시안을 받을 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 『나이트 사커』 출간 무렵에는 해외 아트북 사이트를 열심히 뒤지기도 했고, 『세트장』 때는 표지의 색상 코드를 전달했다. 그러나 작가의 몫은 거기까지인 것 같다. 책은 단순히 독자에게 텍스트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총체적인 경험을 전달하는 물질이며, 어떠한 측면에서는 하나의 공간에 가깝다. 독자들은 책을 읽는 동안 보고, 만지고,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종이의 냄새를 맡고 무게를 느낀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어둠 속에 놓이며, 종이 위로 시선이 돌아오는 순간 다시 밝은 빛을 맞는다. 나는 이 책이라는 공간을 구현함에 있어 나와 협업하는 전문가들을 존중하고 싶다. 작가의 역할은 그중 텍스트 경험을 구상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책이 제공하는 경험의 일부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편집자, 디자이너, 그리고 책 속을 적극적으로 산책하는 독자들의 몫이다. 책이 나오면 편집자와 디자이너분들의 서명을 받아 보관하고는 한다. 내 이름으로 출간된 책이지만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려 한다.

『시차 노트』의 표지.

Q. 작년 말에 출간한 『시차 노트』를 처음에 ‘사치 노트’라고 잘못 읽었다. 서문을 읽으면서 내가 잘못 읽었다는 것을 깨닫긴 했지만, 퍽 괜찮은 제목이라고 생각했었다. 누구나에게 ‘사치’하는 게 있기 마련이고, 그를 통해 그 사람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 김선오라는 사람은 무엇에 사치를 부리는가.
A. 나는 사치스럽게 잔다. 오늘도 아홉 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일이나 작업을 하다가 잠이 쏟아질 때 나는 여지없이 잠에게 진다. 꿈에게도 진다. 꿈이 현실로 틈입할 때 언제나 현실의 움직임을 멈추고 꿈에게 주도권을 내어주는 쪽을 택한다. 꿈에 인왕산이 나오면 인왕산에 등산하러 가고, 꿈에 나온 사람에게 느닷없이 연락을 해보기도 하는 식이다. 꿈은 현실을 재료 삼지만 꿈을 기반으로 현실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 이러한 뒤섞임을 즐긴다. 그래서 잠이 오는 느낌은 언제나 달갑다. 꽤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나날이 모호해져서 새벽에 자다 깨면 내가 알고 있던 현실이라는 것이 발 디딜 곳 없이 와해되었다는 감각에 조금 떨기도 한다. (사실 요즘은 점점 더 현실적인 꿈을 꾸고 있어서 섭섭하다. 꿈에서도 살아내야 할 현실이 있다…….) 나의 잠이 사치스럽게 여겨지기보다 사람들이 잠에 더욱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현실이 우리를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만들려 할 때, 빠르게 흘러가는 현실의 속도에 탑승시키려 할 때 잠은 우리를 우리의 모습으로 붙잡아준다. 꿈속의 시간은 현실의 몇 곱절로 흘러가며, 몇 겹의 현실이 그곳에 중첩되어 있기에 때로 현실이란 내가 꾸는 꿈의 한 층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김형진은 워크룸과 워크룸 프레스, 카우프만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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